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는 서유럽에 있었다..7(나폼쏘)

by 나그네김 2018. 12. 14.

2018.10.30

 

새벽에 일어나니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남부지방인 나폴리.폼페이.쏘렌토를 여행한다.

내가 가장 와보고 싶은곳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폼페이까지 거리는 버스로 약3~4시간 소요된다.

버스에 올라타니 비가 그치고 햇빛이 난다..

임팀장님이 인원체크가 끝나자 마이크를 기영쌤으로 바통터치를 한다.

우리모두 다 같이 그라체~~~라고 아침인사를 외치면서

오늘 여행지를 설명한다..

 

버스안에서 본 호텔전경...

남으로남으로내려오니 날씨가 거짓말처럼 개인다..그것도 화창하게

 

버스안에서 바라본 나폴리..

 

기영쌤의 폼페이 이야기:

폼페이는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된 세계 문화유산이자 이탈리아 내에서는 중오한 의미를 갖는 곳이예요..

내가 굳이 이야기를 안해도 검색하면 다 나오는 이야기들 이예요..그래도 할까요?

""예~~해주세요..

79년에 1979년 아닙니다..호부 79년이예요.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에 묻혀 버린 폼페이는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장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모든것이 보존 되어 있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고향인 폼페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어요

저주받은 도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죠.

폼페이는 174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는데요.

이 발굴 작업의 여파가 굉장해서 전 유럽에 고대 그리스풍의 유행이 새로 생기기 시작했을 정도니까요.

유럽의 부호들은 너도나도 이 발굴 작업에 뛰어들었어요.

서유럽에서 유물,유적은 단순한 예술품 이외에 엄청난 부를 안겨 줄수 있는 또 다른 노다지였기 때문이였죠.

 

폼페이는 비씨6세기경에 그리스의 지배를 받다가 BC80년부터 본격적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았죠.

이후 이 지역은 폼페이뿐만 아니라 에르클라네움이 발전하기 시작해서

폼페이 지역의 인구는 약 3만명에 육박했어요.화산 폭발의 징조는 이미 62년에 일어났고

 인근 도시인 에르클라네움은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 폼페이는 건재했던거죠.

폼페이는 79년 8월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만오천명 이상의 시민들이 7미터 이상의 화산재에 파묻혀 사망하게 됩니다.

전설로 내려오던 폼페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748년도에 이루어집니다.

현재에도 발굴 작업은 거의 완료된 상태이지만 곳곳은 아직까지도 작업 중에 있어요.

 

폼페이에서는 광장, 공중목욕탕, 프레스코화가 그러진 집들, 대성당(법정),원형극장, 베티의 의사당,작은 매음굴

 그리고 그때 당시의 도시 대로를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볼수 있습니다. 500미터 아래에는 전형적인 로마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는 에르클라네움 이 있어요.

폼페이는 상당히 넓으며 60여곳의 볼거리가 있는데요. 이 많은 곳을 다 본다는 것은 무리이고요.

중요한 몇몇 곳만 간추려서 보는 것만으로도 2~3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폼페이는요.로마 지도자들이 휴양지나 별장 등을 많이 지었던 곳이에요.

왜 사시사철 해가 뜨기 때문에 건강에 좋을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화산의 지반열이 있어 그닥

춥지가 않는거죠.

근데요..어제까지만 해도 폼페이가 페쇄였대요..지금 가면 볼수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장담못해요.

비가 너무 많이 왔거든요..그래서 돌맹이 하나 잘못 떨어져도 바로 그자리에서 폐쇄시켜요..다 나가라그래요..

오늘은 우리들의 운빨을 믿어봅시다요..계속 제가 현지인과 통화를 수시로 해 볼꺼에요.

지금 현재까지는 아직까지 입장불가라네요..그래도 일단 한번 가 봅시다..

그 앞에서 개겨봅시다..

 

자 주무시면서 제 이야기 들어시고요..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6세기말에 리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맨처음 발견되었습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클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요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에야 시작되어서1763년 그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이 발견되었던거죠.

 

발굴은 현재가지 간헐적으로 계속된다고 했죠.

초기의 발굴작업은 대체로 무책임했으며 발굴자들은 주로 웅장한 건물이나 박물관에 진열할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나 이러한 발굴은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종식이 되었던거죠.

그는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도 했죠.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잡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던거죠.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을 했어요.

이 기법은 고대의 문,가구,밑바닥의 주형을 뜨는 데도 사용되었다고해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발굴작업은 1951년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지휘아래 집중적으로 재개되었습니다.

그는 1924~1961년에 발굴책임을 맡았는데요.제1구역과 제2구역에 있는 아본단차 가도 남쪽의 넓은 지역이 발굴되었고

 시 성벽 외곽에 쌓인파편들이 치워졌습니다.

그 결과 양편에 나란히 뼏은 멋진 공동묘지가 드러났대요.현재 폼페이의 3/4이 발굴된상태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말이 기억이 안날꺼에요.

일단 가서 보면서 설명드릴께요..주무세요.

근데요..우리가 만약 오늘도 폐쇄되어 못본다면 카프리섬으로 갈꺼에요..시칠리아근처

우와~~~~대박..근데요 배삯이 비싸요..

우리오늘 엄청 바삐 움직여야 되는거 알쬬 쏘렌토도 가야하고 나폴리도 가야하고 바빠요..

그래서 폼페이는요 극히 일부만 둘러볼거예요..다둘러볼려면 여기서 하룻밤을 자야되요.

 

한참을 걸어가야 입장권을 판매하는 곳이 나온다.입구가 몇군데 있다.

 

금방 입장가능하다고 폼페이현지가이드와 기영쌤이 만나서 입장권구매하고...

 

입장하기전 매표소바로앞에서 단체로...

 

관광시에는 반드시 필히 운동화를 착용해야 한다.모두 돌길이다

그시절 마차가 다닌 흔적이 어제 다닌것마냥 선명하다.

 

 

 

 

 

포르타 마리나 문..마니라는 바로 '바다'라는 뜻이란다.

바다로 향해 난 문이라는 뜻

대리석이라 비온뒤 바닥이 미끄러워 외국관광객이 미끄러져 119 아저씨들이 와서 응급처치중...

 

베수비오화산산이 보이고.

여긴 폼페이의 중심지였다고한다. 이곳에서 정치 경제 활동이이루어졌고 여러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주변에 아폴로 신전과 여러 가게들이 있었다. 포럼은 말그대로 중앙 혹은 광장의 역활을 하던 폼페이의 정중앙이다.

오른쪽엔 아직도 발굴중이라는 팻말이 붙혀져 있었고 출입통제였다..

 

집터..그날의 그대로 부셔진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한다.

바닥이 경사가 져있는데 빗물이 잘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햇다.

어떤집은 넓고 어떤집은 작고 그때당시도 돈이 많은사람은 넓고 큰집에서 살았겠지..

그시절 빵굽던 화덕

 

 

그당시 대극장,공연장이다..

지금도 소리가 울리는게 공명시스템은 살아있다.

 

 

 

그시절 목욕탕

 

이곳은 화산폭팔당시 화산재에 묻혀있는 시신을 발굴당시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다..

어린아이를 앉고 있는 사람.. 얼굴을 가리는 사람, 뛰어가는 사람까지 이렇게 잘 보존되고 있었다.

 

 

 

 

 

 

 

유명한만큼 다들 사진 찍느라 정신없이 바쁜모습이었고

날씨가 개이니 베수비오산위로 힌구름이 가득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그렇게 화산을 토해내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전혀 알지못한채 묻혀버린 폼페이사람들...

이탈리아 남부투어에서 빠질 수 없는 폼페이...

영화 폼페이최후''를 한국에 가면 다시 한번 더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있어도 믿기지 않는 폼페이를 뒤로하고

이제 점심을 먹고 지중해연안에 있는 쏘렌토를 간다..